여름이면 한 가구당 하나의 수박을 먹던 시절이 있었대
작년엔 수박주스로 여름을 보냈고. 올해는 너무 비싸서, 혹은 너무 커서 조금씩 소분된 수박을 먹었다.
오히려 좋았다. 수박을 썰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귀찮은 수박껍질도 안버려도 되니까.
근데 뭔가 허전한 여름
수박을 두드리며 고르던 일
다같이 앉아 삼각형으로 썰린 수박을 먹던 일
이번에 고른 수박의 당도와 품질을 논하며 떠들던 일
우리집 초록수박의 멸종은 또 다른 일상의 멸종으로 이어졌다...!
이러다 수박 껍질이 초록색이라는 걸 수박바를 보고 알게 되는 시대가 오면 어떡하지?
그리고 다음 멸종 과일은?!
"올해 첫 수박 먹었어?
아니, 여태 수박도 안 먹고 뭐 했어.
그래도 수박은 먹어야지.
p. 193"
이찬혁의 노래 〈멸종〉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은 정말 사라져버린 걸까?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얕아진 관계들 속에서 진짜 사랑은 점점 보기 드물어지고 있다. 마치 멸종 위기의 생명처럼, 언젠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만 같다.
하지만 김서해의 소설 《라비우와 링과》(2024)는 그 질문에 다른 대답을 건넨다. 외로움에 잠식된 대학생 주영의 삶에 브라질에서 온 교환학생 이네스가 룸메이트로 들어오면서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낯선 언어와 서툰 생활은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리고 닫혀 있던 감정들이 다시 깨어난다.
이 책은 거창한 사건 대신, 사소한 순간들—함께 나누는 밥상, 무심히 건네는 대화, 뜻밖의 따뜻한 시선—이 어떻게 메마른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멸종을 노래하는 음악과 달리 이 소설은 아직도 사랑이 우리 곁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며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잔잔하게 일깨운다.
《라비우와 링과》는 그래서 결국, 사라졌다고 믿었던 감정이 사실은 살아 있다는 희미하지만 확실한 믿음을 되살려주는 이야기다.
'너는 언어를 좋아하는 것 같아. 많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게 꼭 칭찬은 아닌데도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맙다고 말했다. 이네스는 마치 박스를 끄르듯 나를 해체해서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놓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p, 84~85"
한창 날이 더울 때는 기분이 더럽게 안 좋더니,
날이 고새 시원해졌다고 간사하게도 나의 마음은 금방 풀어졌다.
이렇게 날씨 하나에 흔들리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니.
우리는 날씨처럼 작은 요인으로 감정이 요동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다시 균형점으로 돌아오는 것.
다른 사람들은 원점으로 잘 돌아오는데, 나만 그게 힘든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만 멸종위기 균형일지도.
바람 불다, 비가 오다 그러다 햇살이 비추기도 한 거거든요.
그러다 흐리기도 하고.
<기분은 날씨 같은 것이라고> 㲴"
요즘은 인내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상 같다.
그래서 인내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멸종 위기에 몰린다.
누구나 느낄 것이다. 한없이 버티는 것은 뭔가 손해보는 기분을 불러냄을.
하지만 당장은 바보 같은 짓 같아도, 인내의 끝에는 힘이 있고, 결실이 있다.
인내는 세상을 믿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믿는 힘이다.
"열매는 자괴감이 들었다.
호흡을 더 고르자 드디어 생각마저 날아갔다.
버글거리던 것들이 사라지고 서 있다는 느낌만 남았다.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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